책을 한권 내자
직장에서 해고 통지을 받고 50대에 타사 이직 이력서을 준비하는 과장에 문득 나의 인생을 한번 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백수로 살아가야 한다는 직감이 드는 순간 갑자기 가족들 생각이 났다.
한 여자의 남편, 세 아이의 아버지
난 과연 성공한 삶을 산 것인가?
그렇게 많던 메일도 갑자기 수가 확연히 줄어 들었다.
이 직장은 더 이상 내가 필요 없다는 것을 예감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난 화성시 지화리에 태어났고 어린시절을 수원에서 자란 송동일이라고 합니다.
직장생활은 20여년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중국시장에서 대부분 직장생활을 하였고 어느새 50대에 접어 들었다.
경제적으로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았지만 여전히 앞으로 살아 갈 것이 걱정이 되는 사람이다.
물론 30대에 월급도 나오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시기는 아니다.
아무리 현실을 냉정하게 본다고 해도, 앞으로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동안 헛 살지는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딸과 후대에게 나의 존재을 알리고 싶고 직장인으로써 어떻게 아빠들이 사는지 모든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어 이 책을 남기기로 했다.
글의 주제는 일곱번째 현재 재직 중인 회사 이야기을 했고
소재는 각 회사에서 에피소드 및 개인적으로 겪은 이야기을 쓰려고 한다.
또한 앞으로는 한국 귀국후 50대에 어떻게 살아 가는지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늙으신 어머니과 이제는 다 큰 딸아이 이야기도 같이 쓰려고 한다.
또한 굳득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전에는 가난이 싫어 무조건 부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일년동안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마치 "Bucket List" 쓰는 기분이었다.
1. 책 쓰기
2. 미국연수
3. 새벽 4시 반에 일어나기
4. 나머지는 생각 중
우연히 방송에서 힙합하는 가수의 진정한 친구 의미을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진정한 친구는 기쁜일이 있을때 이야기 해보고 슬픈일이 있을때
이야기 해보았을때 반응을 보면 진정한 친구을 구분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기쁜 이야기을 같이 기뻐해 주고, 슬픈일을 이야기 했을때 지적하지 않은 친구
이게 진정한 친구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은 서울에 집을 샀는데 집 샀다는 이야기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대방이 배아파 할까봐 이야기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과연 이런 사람은 제대로 삶을 산 것일까?
어찌보면 현대사회에 실제 모습인지 모른다.
나 역시 백수가 된다는 이야기을 주변 친구들에게 이야기 했을때 과연 내 친구 중 몇 명이라 나을 위로해 줄까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 부모님은 농사을 지으셨는데 모든 부모님들 세대가 그렇듯이 미래에 대한 준비나 재테크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60대에 폐쪽 문제로 돌아가셨고 어머니 역시 젊었을때 고생을 많이 하셔서 지금도 이곳 저곳 아프신 곳이 많으시다
책 제목 산드래미(산둘레 있는 마을)은 어린시절 부모님께서 농사 지었던 곳을 그리며 책 제목으로 선정했다.
비록 부유하게 자라지는 못했지만 부모님들께서는 남들 보다는 더 잘 키워 주시려고 많은 헌신을 한 덕에 그나마 지방대을 나왔다.
대학은 대전에 있었다. 전공은 중어중문학과 였다.
내가 2기 였는데 1기 선배 중에 예비역이 한명 있었는데 신입생들을 잘 챙겨 주셨다.
하지만 데모 참석, 학과 행사 참석을 강요해서 굉장히 곤욕 스러웠다.
군대 제대후 복학 중 중국 북경사범대학 단기유학을 떠났다.
당시 학교에서는 중국인 교수 한명밖에 없어서 그 분과 이야기 하려면 정말 줄을 서야했다.
다름 학우들은 집에도 찾아가고 따로 식사도 대접해야 대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유학을 가보니 온 세상이 스승이었다.
매번 수업 끝나고 학내 사람들에게 이야기을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학우들과 다마스 택시을 타고 이화원, 고궁, 천안문을 돌아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순수한 시절 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밥을 주지 않아 수업 끝나면 밖에 나가 점심 식사을 했다.
중국식당 메뉴판에 모두 중국어로 되어 있어서 무슨 음식인지 전혀 알 수 가 없었다. 지금이야 메뉴판에 사진도 있고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 사진도 없었다.
그래서 중국식당에 가면 옆 사람이 무엇을 시켰는지 훔쳐봐야 했다.
비록 집안에 돈이 없어 풍족한 생활은 하지 못했지만 그 나마 환율이 중국돈 1위안당 100원이어서 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참고로 지금은 두배이다.
당시 중어중문학과 졸업을 하면 향후 막연하게 중국에서 근무하면 돈을 많이 벌 줄 알았다. 당시 1원짜리 중국에만 팔아도 15억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하숙을 하다가 돈이 없어 군 제대후 800만원 전세을 살았다.
졸업할때쯤 이 800만원을 종자돈으로 사회 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외삼춘이 우리 집을 담보로 자동차 대출을 받아서
그 나마 있던 800만원 전세금도 캐피탈 한테 몰수을 당했다.
마음같아서는 형사고소을 하고 싶었지만 친척이라 어쩔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집뿐만 아니라 여러 외가 친척집을 상대로 사기을 쳤다고 한다.
등을 처 먹어도 어떻게 가족들을 등 처 먹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공부 하는지 전혀 모르고 산 것 같다.
아버지는 마냥 공부하라고 하셨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안 알려 주셨다.
때로는 누나, 형이 있는 사람이 부러웠다. 먼저 공부해 본 사람이니 물어볼 수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2명의 동생이 있지만 나 역시 좋은 오빠이자, 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알아서 다 큰 것 같다.
1. 첫 직장
어쨌든 사회의 첫발을 딛은 나의 첫 직장은 무역회사인데 이 것 저 것 짬뽕으로 사업을 했다 특히 부동산쪽 위주이고 관공서 접대을 통해 토지 용도 변경을 하는 회사였다
나와 직접적인 상관은 없었지만 은행업무라든지 간단한 업무을 지시해서 했는데 난생 처음 몇천만원 수표을 주며 은행에 송금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나를 어떻게 믿고 이런 큰 돈을 주시나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부동산쪽은 돈을 참 쉽게 버는가보다라고도 생각했다.
당시 나의 월급이 70만원 정도 였는데 그렇게 큰 돈은 처음 접해 본 경험 이었다.
그 곳에서는 나는 중국 관련 사업을 담당했고 통역, 번역 등 직간접 중국 시장에 참여을 하였다
동기로 여직원이 있었는데 경상도 진주 아가씨 였다. 전공도 같은 중국어과라서 잘 통했는데 아무래도 동료이면서 경쟁상대 였다.
내가 중국 출장시 아무래도 남자이다 보니 리더와 자주 출장을 가서 자기가 가지 못해 많은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든다.
또 한명 기억에 남는 친구는 내 나이 또래였는데 회장 기사이면서 보디가드을 담당했었다.
얼굴도 잘 생기고 피지컬도 좋아 서로 친하게 지냈다. 어느날 갑자기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 출근해서 무슨일인가 물어보니 복싱대회 참가을 했다고 했다.
한편으로 굉장히 부럽고 도전의식을 높이 평가해 주고고 싶었다. 나중에 우연히 연락이 되어 신림동에서 만났는데 같이 술 한잔 하다가 친구들과 내기해서 갑자기 푸시업을 100개 하기고 했다.
지금도 가끔 Facebook으로 안부을 묻는데 현재는 여수시 거문도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서 생활을 한다고 한다.
이 무역회사에서 나의 업무는 중국쪽에 Resin인 Recycle PET, PP, Vindle 등을 수출했다, 문제는 한국 고물상에서 제대로 Recycle 제품을 구분하지 않아 매번 고객 컴플레인을 받았다.
중국 강소성 연운항에 공장을 세워 자체적으로 Recycle 제품 분리 작업을 시행했다, 처음에는 나름데로 잘 되었고 말이 Recycle이지 사실 산업 폐기물이었다.
당시 중국 현지 직원들은 물건 중에 애기 시체도 있다고 이야기을 할 정도 였다.
특히 여름에 냄새가 심하고 환경이 열악했다, 당시 리더는 자금쪽으로 어려움이 있어 여러 투자자들을 모셔왔다 그 중에 한분이 지금도 연락 드리는 한 형님이었다.
이 형님은 당시 1억을 투자하고 투자금 + 월급을 받는 조건으로 같이 근무을 했다.
어떻게 돈을 모으셨는지 물어봤는데 이전에 노가다로 종자돈을 모으시고 재테크로 돈을 불렸고 IMF때 은행이자로 더 많은 돈을 모으셨다고 했다.
당시 옆 공장에 조선족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딸을 취업을해 달라고 해서 같이 근무을 했다.
결국 이 형님과 이 조선족 딸은 나중에 결혼을 해서 현재 의왕시 고천에 살고 계신다.
사람의 인연은 참 무서운 것이다. 당시 나는 그 형님한테 조심하라고 했다. 괸히 책임질 짓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이 Recycle 사업도 중국 상품국에서 테클을 걸어와 수십대의 컨테이너가 Backship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참고로 중국은 해관이 있고 상품국이 있다.
해관은 HS CODE에 맞게 들어왔는지? 확인을 하고 상품국은 밀수가 아닌지? 실물확인을 하는 것이다.
당시 상품국 담당자에게 뇌물도 먹이고 해서 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꽌시 보다는 아무래도 정상적인 거래가 이행 되어야 했었다.
때때로 한국 고물상에서 세척을 제대로 하고 물건을 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여러차례 한국 고물상 사장님들에게 문제점을 이야기 했지만 비용 및 다른 곳에서는 그냥 막 가져 간다고 해서 전혀 의견 수렴이 되지 않았다.
추가로 당시에 한국에서 중국 마늘 관세을 먹이자 바로 중국에서 역시 한국 Plastic Resin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관세 보복을 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어렸을때 중국 영화에 복수극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마치 함무라비 법적에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문구가 생각이 난다.
한번은 한국에서 OPP 테입을 문방구에 공급 하겠다는 고객 요구가 있었다.
당시에 리더와 고객은 광동 박람회도 참석을 했다.
리더는 나에게 명함 한장을 주면서 이 업체한테 OPP 테입을 수입해 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OPP 테입이 있는 광동성 불산시 순덕구을 찾아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곳이 이소룡 부모님들 고향이라고 했다.
비록 이소룡이 태어난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이지만 조상의 뿌리는 이 곳 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에 OPP 테입 색깔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다른 것 이었다.
리더는 상관 없으니 생산하라고 했고 결국 제품을 만들어서 출하준비을 했다. 하지만 제품에 기포가 많이 있었다.
나중에 분명히 문제가 될 것 같아 사진을 메일로 송부해 사용 여부을 문의했다.
고객에 답변은 사용 불가라는 이야기을 했다.
어쩔수 없이 중국 협력업체와 다시 협상을 했다.
다시 생산해 달라고 하지만 중국 협력업체는 보통 이런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서로 협의점을 찾는 와중에 며칠이 지나서 보니 기포가 많이 줄어 들었고 한, 두줄을 자르고 보니 휠씬 상태가 좋아 졌다.
결국은 일주일동안 중국 현지인과 창고에 앉아 Rework을 하고 마지막으로 "컨테이너 실" 봉인하고 이 곳을 떠 날 수 있었다.
한국에 가서 OPP 테입 어떻게 처리 되었냐고 고객에게 문의하니 낮은 가격에 덤핑해 팔았다고 하셨다.
운좋게 중소기업청 해외개척요원 2기로 합격을 해서 상해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
당시 코트라 사무실을 같이 사용하면 전람회 부스 설치부터 전체적인 수출입 업무을 병행 하였다.
모터로라 핸드폰을 사용했는데 차 키만 있으면 재벌 2세가 부럽지 않은 생활이였다.
또한 상해저널 사장과도 알게 되어 잡지가 어떻게 발행이 되는지? 취재을 어떻게 하는지도 보개 되었다.
어쨌든 결국 이 회사는 경영상에 이유로 도산을 하고 말았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월급도 못 받은체 회사을 떠나야 했다
2. 두번째 직장
한국에 돌아와서 우연히 중국기업청에서 주체하는 구직 박람회에 참석을 했다.
거기서 두번째 직장에 바로 합격을 하여 다시 한번 중국 시장으로 파견이 되었다
이 회사는 전자부품 회사로 대기업이 중국에 공장을 지어서 같이 공장을 설립한 케이스 였다
대부분의 월급이 한국에서 지급이 되어서 일부 주재원비 가지고 중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초 파견은 영업쪽에 시작 되었으나 구매팀 중국 현지인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되어 대타로 구매 업무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이것이 앞으로 쭉 일하게될 구매 업무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구매업무 하면서 앞으로 쭉 먹고 살거라고는 상상을 못해 봤다.
대부분 직장인들이 그렇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직장생활과 현실의 직장생활은 천지차이 일 것 이다.
또한 어떻게 지금에 자리에 일하고 있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어찌보면 이 또한 운명이다.
구매업무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마냥 "갑"으로 사는 구매업무을 부러워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힘들고 고된 업무이다.
특히 주변사람의 따가운 시선이 가장 힘들다.
누구한테 돈 받았어, 뇌물 받았어, 집안에 금은보화가 가득있고, 집이 몇채 된다고 생각을 한다.
인정 받지 못하는 부서, 말은 핵심 부서라고 하지만 항상 써포팅 부서 이다. 때로는 욕받이 부서이기도 하다
어쨌든 영업을 맡아 고객 구매팀장에게 인사을 하러 갔는데 협력업체 신규로 온 담당자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책상에 앉아 서류을 보는 모습을 보고,
역시 대기업은 다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In Seoul 대학, 남들이 말하는 번듯한 간판이 있는 대학을 나와야 이런 좋은 대기업 구매팀에 들어가서 나도 저렇게 감히 아무나
쳐다도 못 보다는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는 순간 이었다.
하지만 이 구매팀장도 몇년만에 한국으로 갔고 명예퇴직했다는 이야기을 들었다
"화무실일홍, 권불10년"이라고 그 잘 나가던 대기업 구매팀장도 실업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어쩌면 나도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연봉도 작고 나이도 어리다고 느낀 나는 영원히 일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어찌 되서 결국은 구매업무 및 통관 업무을 같이 하게 되었고 어린나이에 전반적인 관리업무을 총괄 하게 되었다
당시 관리이사는 Owner의 친척이었는데 일본어 및 영어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신 분이어서 그런지 언어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름 일본어도 혼자 독학을 해 보았는데 쉽지가 않았다.
당시 환율도 좋고 한국 월급으로 생활을 하다보니 다름 생활은 나아졌고, 어느정도 돈도 모으게 되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 현지인 직원이 회사육교 위에서 자기 월급 통장을 지켜 보고 있는 것 이었다. 난 당시 내 월급만 알지 다른사람 월급은 몰랐기 때문에
그 직원의 월급 통장을 관심있게 자세히 보게 되었다, 매월 한화로 10만원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턱없이 낮은 월급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중국 현지 직원들은 잔업 하기을 간절히 바랬다.
관리자야 정해진 급여 때문에 굳이 잔업을 원하지 않는다.
문제는 주재원들 역시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다보니 출.퇴근 맛이 없었다.
1~2년이야 그렇게 지낸다고 하지만 몇년이 흐르고 기숙사 생활이 너무 짜증이 났다.
관리팀은 한국 본사에는 경비을 통해 주재원 출입 시간을 철저히 관리을 했고 Owner에게 매일 보고을 했다.
기억에 남는 조선족 여자가 있는데 정말 앙숙이었던 것 같다.
자기한테 잘 보이는 주재원은 이간질 하지 않았고, 미워하는 주재원은 Owner에게 고자질을 했다.
당시 Owner은 이 조선족 여자을 통해서 주재원들을 감시해 왔다.
정말 절대적으로 자유의 소중한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든다.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경험을 했는데 한 주말이었다. 나는 당시 주변에 헬스클럽 회원을 가입했다. 수영도 할 수 있고, 사우나 헬스까지도 같이 겸비된 곳이었다.
토요일 역시 운동을 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 가는 길 이었다. 당시에는 콜택시을 불러 집에 갔는데 비용도 비싸고 콜택시가 잘 불러지지 않는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히치하이킹을 하려고 도로로 나왔고 검은차 한대가 와서 손을 들었다.
하지만 앗 하는 순간 갑자기 자동차 문이 열리고 4~5명이 한꺼번에 나를 납치해 갔다.
차에 끌려간 나는 폭행을 당했고 가지고 있던 물건을 모두 빼앗겼다. 문제는 지갑에 있던 현금 카드가 문제였다.
목에 칼을 데며 나 보고 현금 카드 비밀번호을 알려 달라고 했다. 당시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릴까도 생각을 했으나 도저히 기회가 생기지 않았고
나는 산속으로 끌려 가게 되었다. 당시 한 사람이 차 문을 열고 전화 통화을 하려고 했는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밖으로 밀쳐 나갈 수 있었다.
폭행을 당해 신발도 안경도 없던 나는 불빛이 있는 곳으로 달려 들어 갔다. 뒤에서 소리을 지르면 따라 왔고 나는 단거리 선수 처럼 그 빛이 있는 곳으로 달려 갔다.
그 곳에 도착한 나는 경찰을 불러 달라고 했고 잠시후 경찰이 와서 나는 경찰서로 갔고 그 곳에서 진술을 하고 같이 사고 현장을 참관을 했다.
현장에는 나의 신발 한짝이 덜구러니 남아 있었다. 경찰은 나한테 계속 차량번호을 봤다고 물어봤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볼 수 있었겠는가?
어리버리한 경찰에게 못 봤다고 답변을 했다.
나는 시간이 될때 마다 경찰서에 찾아가 사후경과을 물어봤지만 매번 똑같은 답변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나의 별명이 팬더였다. 눈땡이 밤땡기 되어서 였다.
당시 남방지역은 무법천지였다. 면접보러온 사람이 소매치기 당하거나, 술집에서 패싸움, 때로는 내 창고 직원이 나을 협박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절대 주의 할 것이 돈, 여자, 타인을 윽박지르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
한번은 회사 폐기물을 처리할 시간이 되었다.
보통 몇개월에 한번씩 "재무:경비:구매"가 같이 참관해서 저울을 자기고 중량을 체크하고 돈을 받아 재무팀에 전달을 했다.
그런데 재무 담당자가 시간이 없다고 해서 경비:구매만 참관을 하고 재무에 돈을 전달했다.
하지만 재무에서 갑자기 돈을 못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자기들이 참석을 하지 않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쩔수 없이 관리이사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고, 관리이사는 재무보고 돈을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재무팀장은 돈을 받지 않았고 열 받은 관리이사는 돈을 관리 사무소 바닦에 솟아 버렸다.
그 광경을 본 재무팀장 역시 가방을 들고 집에 가 버렸다.
그 만큼 재무의 힘은 쎄다
직장생활을 종종 머슴에 비유한다.
머슴도 등급이 있다. 재무는 곳간열쇠을 가지고 있는 최상의 머슴이다.
개인적으로 회사생활에서 절대 등지지 말아야 할 부서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가 재무이고, 둘째가 식당(관리팀)이다
절대 이길수 없는 부서 이다.
직장생활내 부서별 우순위도 있다
물론 어느부서에 Owner 친척이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구매는 최하위 부서이다. 모든 부서에 "을"로 살아야 한다.
나름 6년이라는 세월은 여기서 보낸 뒤 다름 결혼할 시기가 되어 30대에 드디어 결혼을 했다
비록 집사람은 한국에서 만났지만 나를 믿고 기다려준 집사람을 위해 기꺼히 사직을 결심했고 한국에서 정착을 하리라 다짐 했다
참고로 집사람은 대학교 졸업시절에 만났다
당시 중국어 실력이 너무 부족해서 중국인 친구을 사귀고 싶어서 우연히 알게된 중국인 교회에서 집사람을 처음 보게 되었다
긴 생머리에 순진해 보이는 인상이 좋았다
사실 결혼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직 사회 초년생이고 집안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집사람이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셔서 결국에는 결혼승락을 받게 되었다.
이 것 역시 운명인가 보다.
당시 나는 총각이라서 인기가 많았다
수천명 여자 직원이 있었고, 사무실 여직원 중에 처녀들도 많았다.
사실 내가 마음만 먹었으면 충분히 사귈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친구을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나름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다.
회사을 떠나겠다고 하니 대타 직원이 들어왔다. 나 보다 나이도 어렸다.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그런데 몇날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 만큼 일이 힘들었다.
추가로 많이가 많으신 대타 직원이 들어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분 역시 1년을 못 버티고 회사을 떠났다고 했다.
세번째 직장을 구하기 전에 한달정도 한국집에 있었다.
당시 큰애와 집사람, 그리고 어머니, 남동생이랑 같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난 큰애 유모차을 끌고 집사람과 같이 홈플러스에 갔다
당시 실업급여도 신청했고 6개월 정도는 쉬자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을 보냈다.
매일 홈플러스 안에 있는 서점에 가서 베스트 셀러 책을 읽었다.
큰애는 집사람과 아이들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 여러가지 인문학 책, 자기 계발서 등 다양한 책을 섭렵했다.
참고로 여기서 우리 집사람의 Best Friend을 양봉 누님을 만났다.
이 분 역시 딸이 우리 지우랑 나이가 비슷해서 금방 친해졌고, 남편분 역시 나이는 많았지만 굉장히 스마트 하셔서 자주 이야기을 나누었다.
나중에 이 형님이 간암으로 돌아 가셨는데 굉장히 아까운 인재가 일찍 세상을 떠나서 아쉬웠다.
특히 양봉 누님은 중국 대륙의 기질을 타고나신 분이다.
성격도 시원 시원하고 엄청 담대 하신 분이다. 남편없이 어떻게 딸을 키울까 걱정도 했지만 나름 잘 키우려서 참 본 받을 것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근래에는 사랑하는 연하의 남자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신다고 해서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3. 세번째 직장
어째든 나는 한국에서 가정을 꾸미며 세번째 직장을 인터넷 구직 싸이트을 통해 알게되고 면접을 통해 입사을 했다
중국에서는 나름 팀장에 위치에서 아랫사람에게 지시을 했는데 막상 한국에 오니 팀장이나 임원이 나한테 지시을 많이 내렸다.
주객이 전도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또 문제는 내 밑에 여직원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 것 이었다. 당시 발주서을 협력업체에 줘야 하는데 이 직원이 하는 말이 자기 시간에 맞쳐 발주서 건수을 요청해 달라는 것이었다.
만약 중국에서 현지인이 이런 말을 하면 바로 혼을 냈을텐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중국 현지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만큼 한국은 인원 통제가 어려웠다.
물론 여기에서 중국업무 외 베트남 업무도 같이 병행을 했고 종종 중국 출장도 갈 수 있었다
특히 좋았던 점은 해외 출장시 일별 출장비을 정산해 주다보니 나중에 나름 월급 외 수익이 발생을 했다. 물론 이 수익은 비상금으로 사용을 했다.
당시 월급은 100% 와이프에게 줬고 관리을 했다.
지금까지도 모든 경제권은 와이프한테 관리을 위탁하고 나는 용돈을 받아 생활을 한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은 재테크에 대해서 전혀 무지 하다.
와이프 역시 집 사는 것만 알았지 막상 집을 사고 나서는 어떻게 재테크 하는지 몰라 그냥 일반 은행 적금을 들고 있다.
어릴때 돈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지가 지금에서야 후회가 된다.
나름 이 회사에서 적응을 할때 이전 중국에서 알게된 분 소개로 네번째 회사 면접을 보았는데 당시 정부가 녹색 성장이라고 해서 앞으로 비전도 좋고 연봉도 좋아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나름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중소기업 이직을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한 눈빛을 보내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회사 마지막 타이밍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조화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해 주셔서 나름 어머니 체면을 살려 드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호상이라고 좋아 하셨고 나는 어머니한테 표정 관리 좀 하시라고 말씀 드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돌아보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도 없다.
어찌보면 우리 아이들 역시 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을 것 이다.
아침에 일찍나가서 밤 늦게 돌아온다.
우연히 읽은 어느 초등학생의 일기가 생각이 난다. "엄마는 맛있는거 만들어 주시고 우리들을 보살펴 주신다. 그런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게 현재 결혼한 우리 남자들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죽어라 일해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가끔 와이프랑 직장생활 힘들다고 하면 항상 우리 와이프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당시만 직장생활 하는거 아니에요.
이 회사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베트남 담당자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이 친구가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듣기로는 베트남 유명대학 엘리트라고 했다. 같이 회식을 했고 소주을 엄청 먹였다.
술에 취해 다른사람 신발을 신고 나와 다음달 다시 회식 자리에 가서 신발을 반납해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아쉬은 것은 베트남을 가보지 못했다. 꼭 가보고 싶었는데 갈 수가 없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베트남 말을 배울 것 그랬다.
언어는 또 하나의 문화을 접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다양한 언어을 배우는 것을 추천한다.
4. 네번째 직장
네번째 회사는 어찌되었는 스카우트로 가게 되었고 포항에 있는데 당시 처음 내 차을 구매하게 되었다.
장농면허을 가지고 이었고 처음 포항 고속도로을 달렸는데 당시 와이프와 큰애을 데리고 내려갔다
낮선 곳에서는 기획이라는 업무을 총괄했다. 이 회사는 나름 그룹이었지만 제조업은 이전에 해 본적이 없는 곳이라서 이곳 저곳에서 인재을 데리고 와서 운영을 했다
녹색에너지 전망, 회사 투자 받는데 올인을 해서 투자금은 어느정도 확보을 했고, 회사 역시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국가 돈은 눈먼 돈이라고 했던가? 부채가 그렇게 많아도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은행 직원에게 많은 로비을 했다.
은행직원은 "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갑"이었다. 추가로 회계사 역시 엄청난 로비을 했다, 결산자료가 안 좋으면 추가 대출이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구매로써 당당하게 "갑"인 줄 알고 대기업 철강업체 문을 두드렸다. 한 회사에서 나에게 욕을 했다. 왜 귀찮게 하냐고
그제서야 알았다 구매라고 무조건 "갑"은 아니라는 것을 당시 포항에 있는 대기업 철강을 얻기 위해 많은 업체들이 로비을 하고 있었다.
포항에 밤거리는 정말 불야성 이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살 곳으로 추천하는 곳이 포항이다. 집값도 싸고, 물가도 쌌다.
나는 전세을 살았는데 30대 평수을 8,000만원 전세로 살았다.
하지만 이 역시 중국 경쟁업체의 추격으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나중에는 워크아웃이 되었다
추가로 이 Owner 역시 나중에 신문방송을 통해 검찰에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행히 나는 기획팀에 있어 검찰에 가지는 않았지만 재무에 있는 한 동료는 검찰까지 출동하게 되었다.
듣자하니 검찰이 어떻게 이런 재무상태로 대출이 가능했냐고 오히려 물어봤다고 한다.
한국에 경제사범은 너무 가볍게 형벌을 받는다.
당시 3명의 아이을 키워서 한달 월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처음으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 매월 월급이 나오면 바로 다 빠져 나갔다.
반대로 Owner은 나중에 인터넷으로 봤는데 2년 6개월 징역을 받았다고 했다.
몇백억 해 먹고 거의 몇년이라니? 이러니 세상이 온통 사기꾼 세상이 된 것이다.
누구는 월급 몇백만원에 뼈골이 빠지는데 누구는 사기 치고 자자손손이 떵떵거리며 사니.
이러니 또 다른 제2의 전두환 전대통령 같은 사람이 안 나오겠는가?
이때 싸이월드을 시작해서 애들 사진을 많이 찍어줬다. 포항에서 둘째, 세째도 얻게 되었다.
어찌보면 우리 둘째, 세째 고향은 포항이다.
5. 다섯번째 직장
다섯번째 회사는 이 전에 아시는 분이 또 녹색 성장으로 앞으로 비전이 좋다고 해서 사람만 믿고 갔다가 난생 처음 월급이 나오지 않는 상황을 맞이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정부 체당금 신청해서 밀린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절대 규모가 작은 회사는 입사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TV에서 일가족 동반자살 사건이 묻득 떠올랐다. 정말 굶어 죽을 수도 있겠구나 4개월 월급이 나오지 않자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당시 기존에 저금한 통장을 깨고 와이프한테는 월급이 안 나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고 원망을 했다, 왜 저 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인지? 어느새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돈 때문이니 저에게 돈 많이 벌 수 있는 기회을 달라고 했다.
또한 다들 나를 보고 있는 눈이이 많았다. 다시한번 죽어라 구직활동을 했다.
운좋게 두 곳에서 Love Call을 불러왔다. 하지만 난 무조건 규모 큰 업체을 선택했다.
이제까지만해도 난 돈의 노예로 산것 이다.
6. 여섯번째 직장
여섯번째 회사는 중국쪽에 사람을 뽑는 다는 이야기을 듣고 도전을 하게 되었다.
나름 규모도 있고 시스템이 갖쳐 있던 회사였다. 이 곳에서 나의 40대을 불태우리라 하는 생각에 가족들 모두 데리고 중국으로 이사해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개발구매였는데 자동차 양산하기전까지 제품을 개발해서 생산에 연계하는 업무을 하게 되었다
다양한 기구물을 접하게 되었고 도면이해부터 APQP에 근거 자동차 양산 Process을 지행 하였다.
이전까지는 전세살이을 했지만 여기서 열심히 모은 결과로 전세끼고 드디어 자가주택을 소요하게 되었다
다행히 중국 물가가 싸서 월급 + 주재원비을 모아 나중에 전세금도 돌려줘서 드디어 완전한 나의 집이 되었다
비록 중국에 있어 머문 시간은 얼마되지 않지만 나에게 굉장한 상징적인 의미을 가지고 되었다
평생 직장생활해서 집 한채 준비한다고 했는데 나는 결국 40대에 꿈을 이룬 것이라 생각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센카쿠열도" 때문에 굉장히 민감했었다.
특히 일본차, 일본 국기 옷을 입고 다니면 봉변을 당하곤 했다.
밖에 되도록 이면 나가지 않는 것이 좋았던 시기였다. 반대로 한국에는 좋은 기회였다.
일본 업체에 비운 공간을 우리들이 많이 차지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드 문제가 떠졌다.
동일하게 한국 업체 공격을 해왔다. 당시 중국 Local 자동차광고 중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 자동차 계약서 취소을 가지고 오면 Double로 보상해 주겠다는 내용이다.
정말 중국에서는 정치적 이슈로 한방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다고 했던가, 중국 공장 역시 중국 경쟁사들의 추격과 엎친데 덥친 격으로 코로나까지 발생해서 대부분 주재원들이 정리해고을 당하게 되었다
설강가상인지 당시 족구을 하다가 발목 아킬레스건을 다쳐 대 수술을 했고 나의 인생은 암담한 터널속에 살게 되었다
집에 있으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직장생활은 어려운 것인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한국집에 여동생이 살고 있는데 빵 빼라고 해야 하나?
난생 처음 머리도 삭발을 해 보았다.
머리카락이 없으면 번뇌도 사라 질줄 알았다. 하지만 걱정은 더욱더 커져갔다.
그 동안 모아두었던 돈들이 점점 줄어 들었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사용해야 할 지경에 도달을 했다.
어려울때 진정한 관계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여동생이 백만원을 보내줬고, 처가댁에서도 일부 돈을 지원해 주었다.
그 때 나는 다시 한번 주변사람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어려울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구만, 잘 나갈때는 간, 쓸개 다 줄 것 같던 주변 사람도 막상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쳐다 보지도 않는 구나 생각을 했다.
현실은 정말 냉정했다.
그때 나는 다시한번 성공에 몸마름을 경험 했던 것 같다.
또한 앞으로는 더 냉정하게 살리라 다짐했다
당시 처음으로 주식이라는 것도 시작을 했다.
한국 퇴직금으로 모두 한국 펀드에 투자을 했고 중국 일부 금액으로 중국 주식을 했다.
결과적으로 모두 마이너스 이지만, 주식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7. 일곱번째 직장
일곱번째 회사는 발목 아킬세스건이 나을때쯤 우연히 중국 현지채용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전을 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갈 비행기표까지 끊어 놓았는데 갑자스럽게 취업이 되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자동차 반도체 수급이 어렵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버티지 못하고 떠나갔고
운좋게 그 자리을 확보하게 되어 근무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조달문제로 이렇게까지 힘들었던 본적은 없었는데 난생처음 이런 납기문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보통 물건 산다고 하면 다들 좋다고 하고 어떻게 하면 더 밀어 넣을까 하는데 반도체는 그게 아니었다.
더 특이한 것은 Lead Time이 무려 1년, 2년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3개월 넘는 Lead Time을 본 적이 없는 나는 상당한 Shock 였다
또한 대부분 협력업체에서 전화도 받지 않았다.
우리생산 Line은 매일 Shortage 났고 고객과 리더는 마치 나를 죄인 처럼 취급을 했다.
더 큰문제는 이 몇개 반도체때문에 다른 부품들을 사용할 수 없어 관련자재들이 장기재고가 발생하고 이에따라 자금이 묶히는 악순환을 겪게 되었다.
이 때 처음으로 반도체들 중 시장품 있다는 것을 알고 되었다.
미리 문제가 되는 반도체을 사재기 해서 가지고 있던 Broker들이 존재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격차이가 없어 자체 구매을 진행했다. 하지만 같은 부품인데 갈수록 가격이 비싸졌다.
더이상 원가 부담을 버티다 못해 고객에서 구매의뢰을 했다. 고객에서도 자기들 최종고객들에게 요청을 했고 처음으로 고객에 돈을 받아 구매 진행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금액이 수십배, 수백배 되다보니 반도체 시장구매 절차가 굉장히 복잡해졌다.
매번 견적을 물을때마다 가격이 변했고 수량도 변했다. 이 또한 고객과 리더는 왜 처음과 다르냐고 면박을 주었다.
결국에는 나름 노하우가 생겼다. 어차피 고객에서 사줄 것 같다는 느낌이 오면 미리 업체에 말해 Lock을 걸어 놓았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별탈 없이 진행이 되었다. 어치보면 천우신조이고 나름데로 나의 "감"이라고 생각을 했다.
나는 중국시장과 구매일을 나의 천직이고 사명감으로 생각하고 일을 했다.
특히 구매일은 윗사람들한테서 수도없이 자기돈이라고 생각하고 업무을 하라고 들어서 이미 귀에 못이 막힌 것 같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나는 항상 내 돈이라는 마이드로
지금까지 보면 어느 직장이든 꼰대가 꼭 있다.
만약에 없다고 느껴지면 바로 그 사람이 꼰대이다.
꼰대의 특징은 일단 그 회사에 오래 다니 사람이다.
그리고 실력은 더럽게 없다. 그냥 지랄만 하고, 자기 윗 사람에게 아부만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다.
어차피 회사는 한두푼 아낀다고 손익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협력업체 돈 못주는 것을 당연히 하고 돈 못주는 것이 마치 구매에서 재고을 많이 가져가서 생긴 일이다 라고 치부 한다.
매번 레퍼토리가 똑같다.
어느새 20여년이라는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나이도 지천명을 넘게 되었다
매 한순간도 이 회사 이 자리에 똑같은 기회는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직장생활을 이어 나갔다.
이제는 딸 3명에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불안함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돌이켜보면 운이 좋아 중국시장에서 지금까지 먹고 살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 환경이 더이상 제조업 사업이 어려워져서 많은 주재원분들이 귀국을 하고 있다
나 역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아이들 교육 등이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직장생활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그 것만으로 일 하기에는 너무 비참한 삶이다
업무에서 만족을 느끼고 개인 성취감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보면 매일 전쟁 속에서 산 것 같다
어느 윗선을 잡아야 할지? 어떻게 하면 일은 덜하고 공로만 다 가져 갈수 있는지? 다들 문제가 되는 것은 보고 안하고 잘 된 것들만 보고을 한다
잘못된 부분을 보고 하면 보고 받은 사람은 내용을 숨기고 감추라고 하다.
더 이상 파고 들지 말아라, 그냥 지시한 것만 제대로 하라고 한다
뉴스나 영화을 보면 부당한 지시을 받고 고민하는 역할들이 많이 나온다
"직장생활은 정말 힘든 삶이다."
나 역시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는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군대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지천명이다. 앞으로 직장생활 잘하면 10년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모아둔 재산은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고 싶은일, 하고 싶은말을 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책을 내 놓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수십번, 수백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 진짜 이것밖에 할 것이 없을까? 수없이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가족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나의 삶을 한번 이야기 해 보자, 우선 중국 이야기을 해 보려고 한다
8. 중국 이야기
우선 중국을 하나로 총칭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중국은 한족외 소수민족들이 공생하며 특히 한족이라고 해도 북방, 남방, 중국내륙쪽으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겪어 본 중국인들은 대부분이 선량하고 부지런하다. 물론 일부 욕심이나 샘이 많아 다름사람 헐뜯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 중국에온 한국사람들은 싼 물가, 초라해 보이는 중국인들은 보고 무시하고, 발맛사지 받으며 우월감에 도취되곤 한다.
더러운 나라, 짝퉁의 나라는 이제 먼 오래된 이야기 이다.
전자상품은 이미 최신식으로 도배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이미 한국을 초월 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오천년 한국 역사상중 중국을 이렇게 무시한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발달한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을 드려야 할 것이다.
만약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조공이나 바치며 살아야 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중국 현지인 밑에 두고 지적질은 못할 것이니까!
우선 나는 중국인들 중 리더로써 한 사람 모셔봤고 나머지는 동료거나 내 직속 부하 그리고 친구들 이었다
친구 중에는 대단히 돈 많은 친구들이 있다
엄청나다. 그리고 꼭 첩이 있다.
마치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 같다.
그리고 큰집에 외제차을 끌고 다닌다. 목에는 금 목걸이를 걸고 다닌다.
직업도 다양하다.
관공소 업무, 특히 배수로 공사, 도로공사, 보안요원 관리, 폐기물 처리, 자동차 판매 등을 한다.
또한 엄청한 꽌시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로비을 한다.
당시 중국인 리더는 한글 보고서을 작성하면 쳐다도 보지 않았다.
영어나 중국어로 보고서을 작성해야 그때서야 내용을 봤다. 상해 사람이었는데 굉장히 프라이드가 강했다
또한 영어을 하면서 꼭 알아 듣는지 물어봤다. 내 영어 실력을 의심하는 것인지?
난 가능하면 중국에서 영어을 사용하려고 한다, 한국도 이전에 마찬가지 였지만 영어을 하면 괸히 있어 보인다.
지금도 영어을 할 줄 아는 중국인과는 되도록 영어로 소통을 하려고 하고, 물론 우리 아이들과도 영어 소통을 즐긴다.
다행히 둘째는 언어에 대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쓰는 단어 수준이 중학교 수준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기회가 되면 미국에 꼭 가보고 싶다.
물론 치안이 굉장히 안 좋다고 들었다.
하지만 영어 Level Up을 꼭 하고 싶다.
지금도 유럽쪽과 화상 미팅을 한다.
Listening이야 대충 알아 듣겠는데 Speaking이 너무 단순하다
고급 회화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다.
수평적인 중국 동료들은 우선 자기 주장이 강하고 원만해서는 양보을 잘 하지 않는다.
어쩔수 없이 리더나 윗분을 통해 업무 전개을 진행한다.
물론 한국 주재원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맡고 있는 부서가 있기 때문에 불리한 업무는 맡으려고 하지 않고
책임 전가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윗사람의 공정함과 합리성이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리더는 공정성, 형평성, 합리성, 논리성이 가장 중요하다.
오래될 수도록 기존 멤버 관계가 있기 때문에 편애와 편견이 심한 편이다.
기억에 남는 리더로는 같이 일본 업체 단가 Nego을 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구매팀도 아니었는데 나를 따로 불러 일본 업체 단가 Nego을 하자고 했다.
물론 그 분 역시 수주을 받기 위해 재료비가 낮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수도 있다.
더 기발한 것은 Nego 방법이었다. 간단하게 말해 이 일본업체한테 현재 한국업체 대체품 개발이 거의 끝나서 바로 구매할 것이라는 암시을 주는 것 이었다.
결과적으로 성공을 했고 20% 단가인하을 이루어 냈다.
그때부터 이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에 어디서 근무을 했는지? 그 분 다이어리에 눈이 갔다.
대기업 상사에 근무을 했고 특히한 것은 다이어리 내용이 모두 영어로 적혀 있었다.
이때부터 나도 되도록 이면 영어나 중국어로 다이어리을 작성하려고 했다.
또 기억에 남는 한 분은 내가 실수을 해도 바로 꾸짖지 않았다. 나름 나의 잘못을 자신에게 돌아보라고 하신 것 같다.
직장상사든 운동선수 감독이든 Owner이든 친절한 사람은 절대 없다.
다를 자기의 목표을 위해 존재 하기 때문이다.
직장이들 사이에서는 연봉에 욕값이 포함되어 있다고들 한다.
한국 속담에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있다
중국 속담도 의미가 같은 것이 있다. “마룻대가 바르지 않으면 아래들보가 비뚤어진다”
그 만큼 리더가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도 동일한 굴레에 갇힌것인지도 모른다.
말 잘듣고 반항하지 않은 부하을 좋아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보게 되었다.
이래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가 보다.
정말 직장생활에서 좋은 리더을 만나는 것은 대단한 천운이다.
개인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실력에도 큰 영향을 준다.
훌륭한 리더는 개인적으로 영감을 주는 리더가 생각한다.
아니면 직접 실천해 보이는 리더가 훌륭한 리더 이다.
대부분 리더은 자기 화풀이 상대로 대한다. 한마디로 욕바지 이다.
사실 가족보다도 더 같이 보내는 것이 직장동료들이다.
나에게는 큰 꿈이 있다.
어디에 있는 우리 회사을 삼성과 현대자동차 처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을 주는 Owner을 만나본 적이 없다.
항상 의심하고 현지 리더에게 계속적인 압박을 준다. 어쩌면 내 능력이 그 정도가 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
그 리더는 중국 자기 숙소에서 자살을 하셨다.
Owner 스트레스인지? 개인 집안사인지? 알수는 없지만?
어쨌든 집안 샤워실에서 목 메달아 돌아가셨다.
이제 돌아보면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당시 관리 직원이 아파트에 가서 확인을 했는데 만약 내가 갔더라면 아마 평생 트라우마로 살 뻔 했다.
이 리더을 전.후로 내가 9년동아 이 회사에서 모신 리더가 7명이나 된다.
반대로 이 회사는 지금 잘 나가고 있다 주식도 7만원이 넘었다.
내가 입사할때만해도 1만원대 였는데, 나의 안목이 형편 없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 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3번에 기회가 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몇번은 이미 지나쳐 간 것 같다
세상을 살다보면 별의별 욕을 리더로부터 듣는다.
지금 돌아보면 기억에 남는 욕은
그 나물에 그밥
똥물을 쳐 먹일 놈
너 낳고 어머니가 미역국을 드셨냐
개새끼, 씹새끼
너 같은 새끼랑은 같이 일 못하겠다
근래 기억에 남는 것은 죽여 버릴까 보다
때로는 나를 탓하는 사람이 스승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직장생활을 임했다.
어렸을때야 뭣 모르고 들었지만 지천명이나 먹고 더 이상 이런 인격 모욕적인 말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어쩌면 아직 간절함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직장문화는 아니요, 안됩니다. 인격적으로 대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Owner, 리더들의 횡포가 갈수록 심각해 지고 있다.
또한 바른말을 한 직장인은 밥 줄을 뺏어 버린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선듯 바른말을 하지 않는다.
자기랑 친한 사람이 있는 모부서는 잘못해도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모부서는 돈을 다루니 터치 하지 않고
매번 만만한 부서만 가지고 달달 볶는 것은 공평하지가 않다.
만약 그 부서에 Owner 친척이 와도 그렇게 하겠는가? 업무는 반드시 공평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 하는 말이 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위 사람과 아랫 사람이 같은 목표을 추구 할때 비로소 승리 할 수 있다."
건강한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소통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근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코로나로 인해 상해 봉쇄가 되었다.
문제가 되는 전자소자을 도저히 빼올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끝없는 협력업체 담당자 설득을 통해 창고직원이 저녁 몰래 창고에 들어가 전자소자을 반출해 온 것이 였다.
중국에서 유명한 속담이 있는데 "위에는 정책이 있고,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
아무리 위에서 지시을 해도 결국에는 아랫에서 방법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는 대충 하는 일이 대다수 이다.
밑에 시켜도 한국인 주재원 팀장이 다시 작성을 해야 한다.
어차피 자기들이 보고을 하지 않기 때문에 대충해서 보고서을 만들어 온다.
또한 대부분 보고서을 중국어로 하기 때문에 한국인 리더들은 다시한번 한국어 보고서을 재작성한다.
똑같은 업무을 반복해서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 들이다.
좋은예로 이전에 한 리더는 영어로 보고서을 작성하게 하였다.
이로인해 한국인, 중국인 모두 공평하게 보고서을 작성할 수 있었다.
역시 해외에서는 영어가 최고 인 것 같다.
직장생활에 꼴불견은 자기 업무는 하지 않고 타부서 업무을 지적하는 것이다.
회의을 하다보면 이런 종류에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품질을 담당하면 불량이나 고객승인 등의 업무을 언급해야 하는데
물류 출하, 자재 조달에 문제점을 이야기 한다.
더 큰 문제는 리더가 이런 것에 대해서 전혀 핸드링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최악의 리더는 엉뚱한 지시, 불필요한 보고 요구, 왜 너 때문에 고객이나 Owner 한테 욕을 먹냐고 불만을 투덜 거린다.
또한 중소기업은 인원이나 시스템상 도저히 전체을 관리 할 수가 없다.
마치 바다에 모든 물고기을 잡는다는 업무 방식은 무식한 관리 방식이다.
중소기업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매일 일보고, 주간보고, 월간보고. 보고을 위한 보고는 아무 의미가없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관리해야 할지 정해야 한다.
또 독특한 팀장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고객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와도 몰랐다. 담당자가 진행하고 있어 팀장은 전혀 내용을 모른다고 만 한다.
리더는 매번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재보고 하라고 하지만 지시한 리더 역시 인간인지라 잊어 버리고 또 지시받은 담당자 역시 매번 동일한 핑계로 임기응변으로 순간 넘어간다.
이로인해 매번 회의 분위기는 무거워 진다.
때로는 허언증 환자 같다.
재산이 얼마이고, 부동산이 몇채이고, 카페을 몇개 있다고 자랑을 한다.
이 직원은 항상 자기 자랑만 한다. 남에게 인정 받기만을 고대 한다.
문제가 있으면 리더가 직접 나서서 문제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밑에 직원이 존경하고 따른다.
또한 아랫직원도 지시 받은 것은 별도로 보고을 하고 설명을 드려야 한다.
물론 일부 못된 아랫직원은 모든 업무와 책임을 윗사람에 미루는 직원도 있다
이런 직원은 빠른 시일내에 정리을 해야 한다.
하지만 보통 외국어을 해서, 이 회사에 오래근무을 해서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제때 정리을 하지 않는다.
이유없는 무덤이 없다고 각부서는 나름 핑계를 댄다.
어떤부서가 안해줘서, 근래 출장을 가서, 다른 급한 것이 있어서 끝도 없는 핑계로 부연 설명을 한다.
이런 핑계는 리더 역시 처음부터 듣고 싶지도 않아한다. 또 시작이군 이라는 표정을 짖는다.
특히 중국에서는 여성의 입김이 강한 편이다.
우선 눈치을 본다. 한마디로 간을 본다.
이 팀장은 며칠짜리인지 Test을 한다.
만만해 보이면 지시한 것을 이행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답변을 시간이 없다. 이미 메일 보냈다라는 영혼없는 대답을 한다.
짜르고 싶어도 대체할 사람이 없다. 무엇보다 리더는 새로온 팀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새로운 팀장이 왔으면 절대적인 신뢰을 주어야 한다. 만약 100% 신뢰을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새로 교체을 하면 됩니다.
책임과 권한을 반드시 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이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다"
회사에 믿음을 주기 위해 새로온 팀장은 주말이든 매일 나와 혼자서 고민을 한다.
반대로 최악의 리더는 골목대장 처럼 똘마니들 데리고 골프을 치러 간다.
반대로 구매팀은 협력업체에게 제때 물품대금을 주지 못해 매번 아쉬운 소리을 해야 하다.
고객은 대응이 늦다고 계속 컴플레인을 계속 한다.
또어떤 최악고객은 자기한테 잘못 보이면 기존에 담당자중에 자기가 짤라다는 식의 협박을 한다.
의외로 양아치 고객들도 많다.
비록 고객에 있어 회사가 존재할 지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갑과 을은 절대적으로 지키면서 살아 왔다.
고객은 왕이다 라는것을 잊으면 안된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연히 한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창업을 해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난 지금까지 자영업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비록 많이 벌지 못하지만 월급날 되면 또박또박 월급 나오는 직장 생활이 나에게 더 맞는 것 같다.
또한 내 친동생이 젊은 나이에 자영업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10여년이 지나서 봤지만 여전히 고전하고 있다
물론 맛,서비스, 가격 등이 안 좋아서 그럴 수도 있다.
기억에 남는 자영업자 사장말은 고객이 고객을 데리고 와서 마치 이자을 불려 주는 것 같다고 했다.
만약 내가 자영업을 한다면 식당보다는 오파상이나 물류쪽을 해 보고 싶다.
그리고 고객 만족을 이루고 싶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한직장으로 은퇴하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이전에는 한 곳에 있는 사람들이 한심해 보였는데 지금은 절대 대단하다고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매번 10년을 목표로 하지만 10년을 채운적은 없다.
인내심 보다는 시장 흐름이나 회사 정치 싸움에서 항상 밀려 나가가 된다.
회사에서 언제가는 짤리고 경쟁력 없는 회사는 결국 망하고 나중에는 모두 죽는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직장생활 중 어떤때는 너무 잘 나가는 기분이 들때가 있다.
성과급도 받고 진급도 되면 그렇다.
하지만 올라가면 내려오듯 이 순간은 정말 잠시뿐이다.
마치 주식에서 최고가을 찍고 영원히 바닦인 것과 같다.
앞으로 더욱 이 직장에 최선을 다해 충성스러운 직장인이 될 것이라는 망상을 하게된다.
앞으로 나에게 기대하는 모든 지시을 100% 달성해서 회사에 보답하겠다는 충신으로 남기을 기대한다.
영원히 자자손손 후손들까지도 잘 나갈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된다.
하지만 고전 영화나 드라마을 보면 어느순간 역적으로 몰려 3대 씨가 말리는 것이 바로 직장생활이다.
언제 눈밖에 나서 멸문지화을 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침회의을 하고 지시한 보고서을 작성하고 업체들과 미팅을 하고 나면 정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전혀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매일 새로운 것이 발생 한다는 것이다.
불량이 발생하고, 납기 Shortgae가 생기고, 고객에서는 계속적으로 필요자료을 요청 받는다.
일을 받아 들이는 사람을 보면 사람의 성격을 알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내용을 전혀 파악 못한다.
어떤 사람은 내용은 파악하는데 처리을 하지 않는다. 분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이지만 누군가 하겠지 기다린다.
결국 상사가 하라고 하면 한다.
어떤 사람은 내용을 듣고 알아서 한다. 문제는 중간 피드백을 받지 않으니 상사한테 보고 후 다시 작업을 한다.
직장생활은 정답이 없다.
안되는 이유는 말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핑계로밖에 상사는 생각하지 않는다.
되는 방법을 찾아 어필을 해라.
나 역시 성격이 직설적이다. 항상 직구로만 공을 던진다.
아무래도 어머니을 닮은 것 같다. 어머니는 항상 다이렉트로 말씀하시고 뒤끝이 없다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 이모들은 우리 어머니한테 연락을 안 하신다.
하지만 3가지 "부"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아부
둘째 공부
세째 안부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역량, 소통, 협업 이다.
그런데 이 걸 잘 하는 회사을 아직까지 다녀 본 적이 없다.
그 만큼 그런회사을 만들기가 어렵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어느새 주변에 망자가 많이 생기고 있다.
이른 나이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전 모셨던 리더 한분, 이 분은 이혼 하시고 중국에서 리더 하시다가 자기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기회가 되서 한번 통화 할 일이 있어 이야기을 한적이 있었고, 그 후로는 쭉 연락을 못했는데 우연히 옛 직장 동료로부터 듣자니 암으로 돌아 가셨다고한다.
또 한분은 타부서 리더 였는데 나름 엔지니어라고 해서 자기 프라이드가 강하신 분이었는데 재산도 많다고 매일 자랑만 하시고 딸 임원고시 붙었다고 좋아 하셨는데
어느순간 암으로 돌아 가셨다고 한다.
조금있으면 내 친구들도 비슷한 소식이 들어 올 것 같다.
"오는데는 순서 있어도 가는데는 순서 없다" 항상 건강을 챙겨야 한다 좋은 음식, 적절한 운동, 충분한 수면, 명상(스트레스 해소)은 반드시 병행 되어야 한다.
기존 직장동료와 헤어짐은 늘 버겁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 더욱 그렇다.
반대로 신규 직장동료는 신선하고 기대가 크다. 하지만 며칠지나면 또 똑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사직은 정말 입사의 몇 곱절의 용기가 필요하다.
어쨌든 항상 재취업은 흥미롭다. 간절함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 할 수 있다.
때로는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고수인지?
철학적 원칙이 있는지?
갈절함이 있는지?
개인적으로 변화을 즐기는 편이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중국 속담에도 "모든 것이 처음에만 힘들다"라는 이야기가 있다